해외여행 및 산행

북유럽 4국을(스칸디나비아 반도)가다-스웨덴 스톡홀름 1편

바우고개형님 2016. 7. 31. 07:38

북유럽 4국(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갑니다.

2016년 07월 19일(화요일) 3일차 

투르크항~실자라인(쿠르즈 1박)~스톡홀름-1

핀란드의 옛수도 투르크를 떠나 실자라인에 올라 발트해를 갑니다.

발트해는 거울같이 맑고 파도도 없이 호수위를 조용히 지납니다.

 

스톡홀름 : 감라스탄 지구

‘스톡홀름’이라는 이름은 1252년 기록물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Stock은 통나무라는 뜻이고 holm은 섬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이 지역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멜라렌 호수(스웨덴어: Mälaren Laken) 상류에서 통나무를 동동 띄워 땅에 닿는 곳에 도시를 짓기로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철광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멜라렌 호수와 발트 해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중요성 때문에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의 덴마크 왕들 사이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1523년 구스타프 1세 바사(스웨덴어: Gustav Vasa) 왕이 즉위하며 중심 도시로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였고, 1600년까지 인구가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7세기 스웨덴이 북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1634년 공식적으로 스웨덴 왕국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무역법에 따라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스웨덴의 상인들이 꼭 거쳐가야 하는 독점 무역의 핵심 무대가 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흑사병과 대북방 전쟁으로 인해 도시 일부가 파괴되는 등 침체기를 맞았으나, 여전히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로서 제 역할을 다 하였다.

19세기에 들어 다시 경제적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구가 크게 늘었지만 자체 출생보다는 주로 이민에 의한 것이었다. 도시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하여 새로운 지역들이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노동집약적 공장들이 도시 내부에 생겨났으며 공업 중심의 도시가 되었다.

시가지 발달 과정[편집]

19세기 초까지 스톡홀름은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 감라스탄(Gamla Stan)과 그 남쪽의 쇠데르말름(Södermalm), 북쪽의 쿵스홀름(Kungsholm) 및 노르말름(Norrmalm), 외스테르말름(Östermalm)의 한정된 지역에만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러다가 19세기 말부터 공업 발달로 인해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하여, 유르고덴(Djurgården) 지역이 개발에 포함됐다.

20세기 초(1900~1930)에는 영국런던 근교 개발 모델을 본따 '정원 도시'를 모토로 주로 개발이 이루어져, 시 외곽의 솔나(Solna), 순드뷔베리(Sundbyberg) 등에 방대한 양의 단독 주택 형식의 주거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때를 맞추어 시민들의 통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트램과 철도가 함께 발달하였다. 1930년대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현대적 도시 건설을 모토로 개발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대량 생산된 형태의 공동 주택들이 많이 지어졌다. 또한 자동차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는 많은 간선 도로가 건설되었고, 이와 함께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세르옐스토르(Sergelstorg)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지하철(스웨덴어: Tunnelbana 툰넬바나[*])로 인해 교통수단의 지형도가 새롭게 바뀜으로써 근교 지역에는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상업 단지와 고층 주거가 위치하고 그 바깥에 저층 주택들이 넓게 분포하는 형태의 개발 모델이 각광을 받았다.

1970년대 이후 지나친 도심 재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로 대규모 개발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가족 단위를 위한 표준화된 주택들이 건설되었다. 90년대 이후로는 전통적인 도시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버려진 역들과 항구 등을 재활용하며 보다 환경친화적인 도시 쪽에 초점을 맞추어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70년대 이후 IT·전자 산업에 특화해 개발된 시스타 (Kista) 지역은 북유럽의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며 많은 IT 기업들이 입주하였다.

 

오늘의 여정은 감라스탄 지구의 (왕궁, 대광장, 대성당, 노벨박물관등)이른시간이라 외관보고 바사박물관 관람입니다.

 

바사호(스웨덴 왕실의 전함)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으로, 바사왕가의 구스타브 2세(Gustav II)가 재위하였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년 8월 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호()가 전시된 곳으로, 스톡홀름의 스칸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1990년 7월 15일에 개관하였으며, 스웨덴 국립 해양 박물관 재단(Swedish National Maritime Museums)에 소속되어 있다.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분주해 막강한 해군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함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바사호는 그 당시 건설된 전함 중의 하나인데, 바사는 길이 69m, 높이 48.8m, 탑승 가능 인원 450명, 탑재 가능 대포 수량 64개에 이르는 거대한 배로 제작되었으며, 동시에 300kg 이상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을 하자마자 열린 포문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수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배에 승선하고 있던 150여 명 중 30여 명이 익사했다.

침몰한 바사호는 1956년 해양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에 의해 발견되어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는데, 인양된 배에서 2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바사호는 1962년부터 임시 박물관에 있다가 1988년에 새로운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1990년 바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박물관으로, 바사호에 관련된 자료와 수장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배의 선박 바닥을 받치는 재목인 용골(keel)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총 6 곳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바사를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은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에서는 바사의 준공, 취항, 침몰, 인양의 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사박물관 [The Vasa Museum, ─博物館] (두산백과)  에서 퍼옴.

 

바사호

 

거울같이 잔잔한 발트해

 

 

 

 

 

 

실자라인 내부계단 모습

 

엘리베이터도 있고

 

드디어 스톡홀름입니다.

 

 

 

대합실 출구쪽 모자이크? 벽화

 

 

 

 

바이킹호 실자라인과 경쟁하며. 상호 협조하여 같은시간에 운행을 하여 어느 한쪽이 사고나 침몰시등 즉시 구호태세를 갖는다고 함. 스톡홀름, 헬싱키, 코펜하겐, 오슬로등 북구 4개국의 수도가 전부 항구 도시이며, 도심 깊숙히 대형서박들의 접안이 가능하다고 함.

 

 

 

 

 

왕실 근위병

 

공주와 그의 남편(현대판 남자 신데렐라)

 

국회 청사(스웨덴의 국회의원 청렴과 처우는 스웨덴 국회참조)

 

왕관이 모두 몇개 일까요?

 

 

 

노밸박물관

 

 

 

2차세계대전시 건물벽에 밖혀있는 불발탄

 

 

노벨박물관 후문의 초병초소. 현재는 한국인 간이 남자화장실.(많이 이용합니다. 이쪽의 나라는 모두 유료 화장실입니다.)

 

민속박물관

 

 

 

바사 박물관(위의 설명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