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완주)

백두대간 3회차 2009 03 08

바우고개형님 2009. 3. 9. 15:51

백두대간 3회차 구간 2009 03 08

백두대간길을 5회차 부터 진행하여 부득이 미 답사구간을 다녀옴

주촌리(530m)~수정봉(804.7m)~여원재(561.8m 국도24호)~고남산(846.5m)~권포리

고기리에서 대간의 주능선인 730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1km 이동한 지점의 주촌리 버스정류장에서 이번구간 시작합니다.

일차적으로 산악회 3기 일요대간팀에 합류하여 땜방할 예정입니다.

산행거리 11.5km + 1km = 12.5km    산행시간(들머리 11:27 ~ 날머리 16:37 소요시간 5시간 10분) 

날씨는 화창하고 멀리 남으로 지리산 천왕봉 에서 북으로 남덕유까지 조망 양호하고

 

 여기 출정하는 일요 3기팀의 장도를 축하하며 모든 분들이 진부 향로봉 까지 완주하시기를 빌어보며

미답사구간의 때방을 합니다

 

마을 대간길에 서있는 표지석

 

노치마을

 

대간 정맥이 잘 표시된 한반도 지도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는 백두대간길

 

이렇게 맛좋은 샘도 있고

 

 

 

이제는 수정봉오르는 대나무숲길

 

당산제전으로 울창한 소나무 4그루가 서있죠

 

 당산제전의 멋진 소나무 4그루

 

수정봉 가는길에 멀리 지리산 서북능 하늘금 

 

 

수정봉 설명 표지  옛부터 수정이  출토되었고 신라와 백제가 자주 싸우던 봉우리 라네요

 

 

 

지나온 수정봉 마루금 멀리 대덕산 덕유의 하늘금

 

멀리 남원 읍내

 

여원재를 향하여 한군데 모인 대간팀

 

여원재 석상 일부분만 보이네요

여원재의 내력 : 고려 말기 왜구들의 잦은 토악질로 이길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큰고개길로

 주막에 예쁜 주모가 있었는데 왜구의 두목놈이 이 주모의 왼쪽 유방을 만지며 욕을 보이자 주모가 자기의

칼로 유방을 베어버리고 죽어서 원한이 서린곳 이란 지명의 유래.....이 여인이 훗날 이성계의 꿈속에

현몽하여......

 

 

 

여원재

 

밭길도 가고...

 

마을옆으로 가고.....

 

고남산 오르며....

 

고남산 정상부...

 

국방부 지리연구소의 삼각점 : "이표식을 파괴하는자는 엄벌에처함" 라고 쒸어 있음

 

정상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횐 하늘금이 부분이 천왕봉의 눈 입니다 

 

가운데 불끈 솟은 부분이 반야봉

 

정상석에서 옆에 보며는 석성의 규모가 약간 있는데 조선태조가 고려말 장수로 있던시절에 축성하였고

이곳 황산벌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침(고남산 전투 유래 : 이성계가 잦은 왜구의 출몰에 수많은 고려의

장수들이 번번이 왜구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왕는 이성계 장군에게 3,000의 군사를 주어 왜구를 물리치라

하여 이곳에와서  적진을 살펴보니 군세가 약10배에 달하는 30,000 명이라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여도 별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어 애를 테우던중 꿈속에 웬 여인이 현몽하여(애통하게 죽은 여원재의 주모) 신묘한 방법을

알려주어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한 곳

이곳남원의 운봉면(雲峰面) 은 지리산과 대간길로 울타리 쳐진 분지로서 옥토로 농산이 풍성하여 예로부터

신라와 백제의 주요전장이 되었던곳 계백장군의 논산 황산벌과는 다른곳 임...    

 

 

 

머리보이는 노고단과 성삼재 하늘금과 고갯길 앞에 보이는곳은  만복대 대간길

 

정상과 산불감시초소 이날도 어르신 두분이 감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옛 석상을 배경으로 뒤에 보이는  고남산

 

마르고 닳은 옛 석상

 

 

 

하산길의 버들가지 

 

저앞 봉우리가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 5월 중순경이면 이곳 남원 운봉면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상춘객으로 몸살은 알겠지요...

 

황산(697.2m) 아래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 마을은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배경마을로도 유명하지만 국악인들에게도 판소리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지는 동편재와 서편재, 그 중에 운봉은 동편재의 뿌리다.

동편재의 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송 홍록”(1780년경~ 1863년경)명창이 이 비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귀곡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창 “박 초월” (1916·1983)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인 까닭이다.

최근 남원시에서는 황산대첩비 옆 비전 마을에 이 들의 생가를 복원했다.

여원재는 24번 국도가 지나가는 백두대간 남쪽에 있는 큰 고개이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끝임 없이 행해지고 있을 때 고갯마루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에 얽힌 슬픈 전설은 지나가는 대간꾼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에게 밥과 술을 파는 신세였지만 “어찌 내가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라”하며 왜놈이 만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오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왜구의 노략질과 약탈이 극심했던 1380년 우왕6년 양광(경기, 충청),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남원에서 배극렴과 합류 왜구 토벌에 나선다.

팔랑치를 넘어온 불사신으로 소문난 왜장 아지발도를 상대하기 위해 여원재를 넘을 적에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내 원수를 같아~~~ 주~~”하며 이렇게 저렇게 ~~~ 전략을 가르쳐 준다. 이성계가 깜작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그 전락이 무엇이었을까?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아리’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황산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속에서 백발여인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을까?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없는지라 하늘을 향하여‘천지신명이시어~~~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감동했는지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칠흑 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깜작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이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개 했다.

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날리자 아지발도는 벗겨 지르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신궁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에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한다.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하던 왜구의 적장이 죽는 순간이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의 수가 10배가 ㅁ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 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 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이 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고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꿈에 나타난 백발의 여인이 주모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후 태조 이성계는 고갯마루에 ‘여원’이란 사당을 짖고 그 여인의 넋을 달랬고 후세 사람이 이 고개를 ‘여원치’라고 불렸으며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 부른다(이 문장은 이곳의 유래를 돕고자 퍼옴)

다음 산행은 한강기맥 2번째 코스 유명산 예정입니다.